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케리 그랜트 (문단 편집) == 여담 == * 딸 [[https://www.imdb.com/name/nm0335462/|제니퍼 그랜트]]도 배우로 데뷔했는데 드라마 "[[베벌리힐스]] 아이들(Beverly Hills, 90210)"(1993-4)과 "무비 스타스(Movie Stars)"(1999-2000) 등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바빌론(영화)|바빌론]]>(2022)에도 잠깐 출연했다. * 딸이 쓴 회고록 [[https://www.amazon.com/Good-Stuff-Reminiscence-Father-Grant/dp/0307267105|Good Stuff: A Reminiscence of My Father, Cary Grant]]이 있다. 그랜트가 경력까지 포기해가며 양육한 딸인만큼 다정하게 보살핌 받았던 순간들과 유쾌한 일화들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딸은 인터뷰에서 캐리 그랜트가 본인이 어려서 겪은 일을 딸인 자신은 절대로 겪지 않게 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으며, 캐리 그랜트가 주양육자를 자처한 덕분에 어머니 다이언 캐넌이 계속 배우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재벌 피터 [[https://www.cadbury.co.uk/|캐드버리]]와 절친한 사이였다. [[프랭크 시나트러]]와 [[그레고리 펙]]도 그랜트를 자주 찾던 친구들이었다. * (1951)는 원래 그랜트를 위해 만들어진 기획이었다. 그랜트가 여의치 않자 [[로프(영화)|팔리 그레인저]]에게 넘어갔다. * 굉장한 [[구두쇠]]였다. 그랜트가 게이라는 의심을 받은 이유 중 하나도 생활비를 아끼려고 동료 배우 랜덜프 스캇과 [[동거]]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내 바버라 허튼과의 이혼 사유도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여성 중 하나였던 허튼의 평소 씀씀이를 그랜트가 늘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색하게 굴었다는 소문이 있다. 사인해줄 때 돈을 받았다는 소리도 있고, 직원들이 몰래 훔쳐먹지 못하게 냉장고에 있는 우윳병에 금을 그어가며 마셨다는 등 전해지는 에피소드가 다양하다. 집에 손님들이 찾아오면 집에 머무는 동안 소요된 비용을 계산해 청구했다는 얘기까지 있다. 그랜트가 활동할 당시부터 떠도는 풍문이었고 취재가 된 사항이 아니다. 이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아버지에게 유기 당해 고아처럼 자라 초등학생 때부터 생계를 스스로 꾸려 나가야 했던 불우하고 가난했던 성장과정 탓일 거란 추측들이 있다. *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와 <아세닉 앤 올드 레이스>(1944) 출연료를 전쟁자금으로 기부했다. 팬덤에서 인색했단 소문에 대한 반박 자료로 제시하곤 한다. * 어려서 사고를 당했을 때 치과대 재학생에게 앞니 하나를 통째로 뽑히면서 앞니 하나를 영구 삭제 당했다. 잘 보면 앞니가 하나 밖에 없다. 치아 틈이 자연스레 메워져 있어서 눈치 채기 어렵다. * 2001년 고향 브리스톨에 실물 크기의 [[https://www.theguardian.com/film/2001/dec/07/news1|동상이 세워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ary_Grant_statue_Bristol.jpg|width=100%]]}}} || * [[크리스토퍼 리브]]는 <[[슈퍼맨(영화)|슈퍼맨]]>의 [[클라크 켄트]]를 연기할 때 <베이비 길들이기>의 그랜트 캐릭터를 따와 형상화했다. * [[잉그리드 버그만]]이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불륜으로 헐리웃에서 추방당하다시피 쫓겨났다가 다시 복귀하였을 때 오직 그랜트만이 버그만과의 우정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 그랜트는 전처 벳시 드레이크의 영향으로 최면 요법을 공부하게 되었고, <[[오명]]>을 촬영하던 당시, 압박이 심했던 버그만에게 최면 치료를 시술해서 영화촬영을 순조롭게 끝낼 수 있었다. * [[하워드 휴즈]]와 친구여서 1937년 휴즈의 부탁을 받고 [[캐서린 헵번]]에게 휴즈를 소개 시켜 커플을 성사시켰다. 이런 인연과는 별개로 여러 번 함께 공연했지만, 케리 그랜트는 캐서린 헵번과 서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난 원래 키 크고 깡마르고 성격 드센 여잔 싫어하지만 캐서린 헵번은 예외였다."란 말은 남겼지만, 케리 그랜트가 꼽은 최고의 여배우는 [[그레이스 켈리]]였다.[[https://www.imdb.com/name/nm0000026/quotes/?ref_=nm_dyk_qu|#]] 캐서린 헵번 역시 케리 그랜트에 대해 "[[https://www.imdb.com/name/nm0000031/quotes/?ref_=nm_dyk_qu|He is personality functioning.]]"(그의 성격이 잘 먹힌다.)란 짧고 시큰둥한 평가만 남겼다. * 그랜트가 주선해서 잘 됐던 또 다른 커플로 로잘린드 러슬과 그 남편이 있다. 영화제작자 프레드릭 "프레디" 브리슨[* Frederick Brisson. 1912 - 1984.]은 <여자들>(1939)을 보고 러슬에게 반했고, 친구 그랜트가 1939년 <연인 프라이데이>(1940)를 찍을 때 상대역이 된 러슬을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랜트는 러슬에게서 브리슨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기 위해 몇 주 동안 촬영장에서 러슬에게 인삿말로 "프레디 브리슨이란 사람 만나본 적 있어?"란 소리를 끈질기게 해댔고, 두 사람의 첫 데이트에도 동행했다. 1941년 그랜트가 신랑 들러리를 맡은 가운데 결혼한 러슬 부부는 백년해로했다. 사진 속 제일 오른쪽은 그랜트의 두 번째 아내 바버라 허튼.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Rosalind Russell_and_Freddie_Brisson_with_Cary_Grant_and_Barbara_Hutton.jpg|width=100%]]}}} || *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아역 스타 시절에 그랜트의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테일러는 이 당시의 경험에 대해 회상하며 "그랜트는 내가 나 자신을 재밌고 흥미로운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어줬다"고 했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366667699b51282871d03d92b8f566c4.gif|width=100%]]}}} || * [[캐리 피셔]]가 한참 [[LSD]]에 빠져있을 때 딸이 걱정된 [[데비 레이놀즈]]로부터 (경험자로서) 얘기 좀 해달라고 부탁 받은 적이 있다. 피셔는 자신이 "적정량"을 복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 반발했다.[* 자신의 중독 정도면 일종의 joypop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피셔의 관점에선 그랜트도 의사의 지시 하에 의학적으로 복용했던 것이니 역시 문제될 게 없는 케이스였다. 이로 인해 피셔와 레이놀즈의 사이는 한층 더 나빠졌다. * 1958년부터 너무 정치화 됐다며 [[아카데미 시상식]]을 12년 동안 거부했다. 1970년 그간의 공로를 기리는 영예상을 받으며 끝이 났다. 시상자는 친구 [[프랭크 시나트러]]였다. * 1975년 [[MGM]] 이사진으로 합류했다. * [[장미]] [[육종]]사 Meilland International에서 1987년 그랜트의 이름을 딴 주황색 [[월계화]] 개량 품종을 만들었다. 톡 쏘는 강한 향기가 난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20221209_212048.jpg|width=100%]]}}} || * 그 시절 배우 중에서는 텔레비전 경력이 없는 배우다. * "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인 척 하다가 끝내 그 사람 자체가 되었다. 그 사람이 내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혹은 어느 한 순간 나와 그가 마주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ITV]]에서 [[스트리밍]] 서비스 ITVX의 대표작으로 내세울 4부작 전기 드라마 Archie를 제작한다고 발표했다.[[https://deadline.com/2022/08/jason-isaacs-cary-grant-itv-britbox-international-archie-1235087095|#]] 그랜트의 본명인 아치볼드 리치(Archibald)에서 따온 제목이다. 그랜트 역을 맡은 [[제이슨 아이작스]]는 "세상에 케리 그랜트란 아이콘은 오직 하나 뿐이기에 스스로 그랜트가 되어보려는 멍청한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래도 (내가 연기할) 아치 리치는 그랜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인 케리 그랜트와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존재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랜트의 네 번째 아내 다이언 캐넌과 딸 제니퍼 그랜트가 총괄제작을 맡았다. * [[메소드 연기]]법에 반감을 가진 듯하며, 이와 관련해 "I have no rapport with the new idols of the screen, and that includes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 and his style of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 It certainly includes [[몽고메리 클리프트|Montgomery Clift]] and that God-awful [[제임스 딘|James Dean]]. Some producer should cast all three of them in the same movie and let them duke it out. When they've finished each other off,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y]] and I will return and start making real movies again like we used to."(나는 말론 브란도의 메소드 연기가 특별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여기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형편없는 제임스 딘도 포함되고요. 영화 제작자들은 이 셋을 한 영화에 캐스팅해서 서로 죽이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서로를 끝내면 제임스 스튜어트, 스펜서 트레이시와 나는 돌아와서 예전처럼 다시 진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것입니다.)[[https://www.imdb.com/name/nm0000026/quotes/?ref_=nm_dyk_qu|#]]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무언가를 느낀 듯 1966년 본인이 언급한 천재 메소드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불과 45세에 생을 마감한 바로 그 해 Walk Don't Run(1966)를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그 후 [[뉴 할리우드]] 시대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메소드 연기는 할리우드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시작점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가 있었다. 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주연배우 [[워렌 비티]][* 워렌 비티도 메소드 배우다.]는 먼 훗날 자신이 제작・각본・감독・주연을 모두 맡은 <[[https://en.wikipedia.org/wiki/Heaven_Can_Wait_(1978_film)|천국의 사도]]>[* 비평과 흥행에서 말 그대로 초대박을 친 워렌 비티 대표작 중 하나다.]에 케리 그랜트를 캐스팅하려고 무척 공을 들였지만 케리 그랜트는 끝내 거절했다. 해당 배역은 [[제임스 메이슨]]이 맡았다. * [[존 웨인]]은 케리 그랜트의 잘생긴 외모를 부러워했다. "그 사람 65살 때 얼굴이 내 전성기 때 얼굴 보다 잘생겼을 것."이란 말도 남겼다.[[https://www.express.co.uk/entertainment/films/1746667/john-wayne-cary-grant-she-wore-a-yellow-ribbon-spt|#]] [각주] [[분류:영국 남배우]][[분류:미국 남배우]][[분류:영국의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영화 배우]][[분류:1904년 출생]][[분류:1986년 사망]][[분류:1931년 데뷔]][[분류:1966년 은퇴]][[분류: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분류:잉글랜드계 미국인]][[분류:브리스톨 출신 인물]][[분류:복수국적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